원목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어디하나 들뜬 구석이나 삐걱이는 부분 없었다. 류이연이 집을 찾지 않은 스무 해. 그 사이 주사헌은 한 뼘 넘게 자랐고, 저택 주인의 얼굴엔 지워지지 않을 그늘이 하나 둘 자리잡았다.
홀로 언덕 위에 자리잡은 저택만이 스무해 전과 달라진 것 없이 서있을 뿐이다.
세번의 식과 한 번의 장례식
오랜만에 객을 맞이하기 위해 정돈된 장소는 집이라기 보다 잘 꾸며진 세트장 같았다. 당장 성에 차지 않는 부분만 짚어도 수십가지겠지만, 이를 하소연 할 마음도 들지 않아 남는 것은 불유쾌한 침묵뿐이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분주히 쓸고 닦던 이들은 대체 어디들 가셨는지, 시계초침소리만이 주사헌의 신경 한구석을 톡,톡 건드리는 것이다….
점검하듯 집안을 한차례 둘러보던 사헌은 기어코 창고 구석에 먼지가 쌓인 것을 발견하고야 마음을 놓고 다시 제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제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모조리 치운 탓에 수년간 집에 돌아오지 않은 형제들의 공간보다 비어있었다. 물건에 정을 붙이는 부류는 아니건만, 책상과 침대뿐인 단촐한 이 공간을 주사헌마저 삭막하다 평하곤 했다. 마치 그 방을 처음보는것 마냥 찬찬히 뜯어보다, 괜스레 혀나 한번 차고 만다. 벽에 걸린 커튼을 제꼈다.
"오늘도 왔네요." 이성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 능청스레 말을건다. 언제부터였을까. 사헌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건. 오래 이어진다. "그럴수 없어요. 미안해요." 답지않게 침통한 낯이 된다. 오늘은 아버지를 만나러가야하거든요. 죄책감이라도 담긴 것 처럼 다정한 투. 그럼에도 창문은 닫히고, 커튼이 다시 창백한 달빛을 가린다. 빛이 사라지자 사헌은 언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 무감한 낯으로 시계 바라본다. 새벽이라 하기엔 조금 이르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늦은 시각. 남자가 다시 한 번 방 밖으로 나선다.
사헌은 노크 두 번 후 허락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예정에 없던 손님을 맞이한 저택의 주인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에게 있어 사헌은 아직 이 집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는 존재였다. 신경전이라고 하기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진다. 결국 인내심이 먼저 동난 -가 먼저 헛기침하니, 사헌 그제야 밝은 낯으로 대뜸 입을 연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이 발에 챈 깡통처럼 볼품없이 구겨진다. 그 표정을 보고 사헌이 올라간 제 입꼬리를 톡톡 치며, 가끔 웃으시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한다. 누가 알아요? 그러면 정말 웃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내내 독백하던 그에게 결국 다시 백기를 든 것은 타카나시 쇼였다. 그제야 들려오는 핀잔 같은 대꾸에 주사헌이 마른 웃음소리 다시 내었으나, 아까의 다정한 음색은 이미 흩어진 지 오래다. "왜 저였습니까." 일순 불길하기까지 한 목소리가 여전히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흐른다. 그가 이제 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아들을 연기하기엔 너무 늦었음을 온 저택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제일 닮았기 때문이다." 그건 듣고 싶은 말도, 정답도 아니었다. 다만 그 덕에 주사헌이 크게 웃고 마는 것이다. 저는 외탁했습니다. 답지 않은 농으로 웃음을 간신히 마무리 지은 주사헌이 다시 무감한 낯으로 타카나시 쇼를 바라본다. "진심이라면. 아버지, 사람 보는 눈이 영 없으시군요."
문이 다시 닫히고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내내 제 할 말만 하고 간 셈이다.
"지금은 당신이 아니면 안 돼요."
선언으로부터 수십 분이 지나고서의 일이었다. 어쩌면 며칠이 지난 이후였을지도 모른다. 남자가 곁에 남길 택한 이상 수를 세는 건 무용한 일이었으므로. 다만 마찬가지로 언제부터 열려있었는지 모를 창문 위로 커튼이 나부낀다. 틈새로는 앳된 소녀의 낯 대신 타카나시 쇼가 자신을 들여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남자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새로운 머리께서는 사람 보는 눈이 영 없으시군요." 하지만,
"나도 그래요. 처음부터 당신이어야만 했어요."